2,500만 원에서 17억까지 8화 – 샹들리에
제이파크 오링벳, 초점 없는 눈으로 올려다본 샹들리에. 500페소 테이블과 막탄에서 라푸라푸까지 두 시간 반을 걸어온 새벽.

등장인물
- 배창수: 세부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전 정켓 에이전트. 회장님을 끝까지 모시기로 한다.
- 남궁 회장: 부산 건설회사 대표. 제이파크에서 다시 무너지기 시작한다.
- 제이파크 딜러: 표정 없이 칩을 쓸어 가는 남자 딜러.
- 마바리장 현지인들: 500페소 테이블에서 회장님과 함께 카드를 까는 필리핀 사람들.
첫째 날, 제이파크
제이파크 카지노 문을 들어서는 순간 창수는 걸음을 멈췄다.
공기가 무거웠다. 이 바닥에 몇 년 있으면 생기는 감각이 있다. 테이블 근처에만 가도 그 자리가 뜨거운지 차가운지 안다. 저 끝 테이블, 회장님이 앉은 자리에서 음산한 기운이 밀려왔다.
창수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 두 테이블 건너에서 회장님 등만 봤다. 회장님은 창수가 온 것도 몰랐다.
회장님 앞에 칩이 있었다. 어제 만든 600만 페소가 아니었다. 한참 줄어 있었다.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한 시간 반 사이에.
그리고 회장님이 칩을 전부 밀었다.
오링벳. 남은 걸 한 판에 다 거는 것.
회장님은 카드를 받아 쪼지도 않았다. 힘없이 툭 던졌다. 딜러가 무심하게 카드를 뒤집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칩을 그대로 쓸어 갔다. 딜러는 바닥만 보며 칩을 정리했다. 떡집 기둥이 딜러 쪽 트레이로 옮겨 갔다.
회장님 몸이 의자에 늘어졌다.
고개가 천천히 뒤로 젖혀졌다. 카지노 천장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회장님은 그걸 올려다봤다. 초점이 없었다.
창수는 그 얼굴을 이렇게 표현했다.
창수: “형, 사형 선고 받은 사람 얼굴 본 적 있어요? 딱 그 얼굴이었어요.”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른다. 창수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컵라면

회장님이 일어났다. 창수가 그제야 다가갔다.
창수: “회장님…”
회장님: “어, 왔냐. 뭐, 오링이지 뭐. 삽 됐네.”
회장님은 웃었다. 웃는 얼굴이 더 아팠다.
회장님: “일단 방으로 가자.”
크림슨 리조트 방. 열흘을 잡아 둔 그 넓은 방에서 회장님은 컵라면을 하나 먹었다. 창수가 편의점에서 사 온 거였다.
회장님: “삽 됐네, 삽 됐어. 창수야, 형 괜찮다. 너 들어가 있어.”
열흘
다음 날부터 전화가 왔다.
회장님: “창수야, 200 들어왔다. 애들한테 얘기해서 페소로 바꿔 와라.”
200만 원. 오링.
다음 날, 300만 원. 오링.
200, 300, 400, 200, 300, 200, 500. 열흘 동안 한국에서 들어온 돈이 3천만 원이 넘었다. 전부 제이파크 테이블에 녹았다.
방값은 창수가 냈다. 밥값도, 택시비도 창수가 냈다. 그동안 모아 둔 가이드 수입과 가끔 받은 롤링피에서.
그러다 이틀 동안 돈이 한 푼도 안 들어왔다. 열흘짜리 방은 끝나 가고 있었다.
창수: “형님, 저희 집으로 가시죠.”
회장님: “너 집에 애도 있고 제수씨도 있는데, 형이 어떻게 가냐.”
창수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혼자 두면 무슨 생각을 할지 몰랐다. 오 사장한테 다 털린 건 회장님 탓이 아니었다. 1억을 팁으로 준 사람이었다. 돈이 되든 안 되든 끝까지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라푸라푸의 작은 집에서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다.
한 달째, 500페소 테이블

매일이 똑같았다. 휴대폰, 카톡, 전화. 휴대폰, 카톡, 전화.
한국에서 100만, 200만 원이 들어오면 회장님은 막탄으로 나갔다. 라푸라푸에 워터프런트가 있었지만 굳이 익숙한 막탄으로 갔다.
창수는 몇 번 따라 나갔다. 그리고 따라 나간 걸 후회했다.
한 판에 1억 5천, 2억을 때리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500페소짜리 테이블에 현지인들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만 원짜리 칩 몇 개를 쥐고. 카드 받는 게 무섭다던 사람이, 2,000페소를 걸고 내추럴 9가 나오자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질렀다. 옆자리 필리핀 아저씨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창수는 그 얼굴을 보면서 화가 났다. 씁쓸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짠했다.
그 뒤로 창수는 웬만하면 따라 나가지 않았다.
두 달째, 새벽 4시

어느 날 아침, 200만 원이 들어왔다.
회장님: “창수야, 오늘은 오지 마라. 형 혼자 갈게.”
창수: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이 나갔다. 낮이 지나고, 저녁이 되고, 밤이 됐다. 열두 시가 넘었다. 새벽 두 시. 전화가 없었다.
창수는 잠을 못 잤다.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안 들어와도 잠이 안 오는데.
새벽 네 시. 현관문 따는 소리가 났다.
회장님이 들어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신발과 바짓단에는 하얀 먼지가 덮여 있었다.
창수: “형님, 밖에 비 와요?”
회장님: “아니다. 생각할 것도 있고 해서, 걸어왔다.”
창수: “어디서요?”
회장님: “막탄에서.”
막탄에서 라푸라푸까지 택시로 40분. 걸으면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 세부는 마닐라와 달라서 가로등도 드문드문하고, 길도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곳이 많다. 중간에는 밤에 혼자 다니면 안 되는 동네도 있다.
200만 원을 바꿔 나가서 택시비까지 탈탈 털린 거였다. 그래서 땀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 밤길을 걸어온 거였다.
베란다

회장님: “창수야, 담배 하나 줘라.”
두 사람은 베란다로 나갔다. 라푸라푸의 새벽은 조용했다. 멀리 개 짖는 소리만 났다.
회장님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젖은 셔츠에서 김이 올라왔다.
창수는 그 옆얼굴을 봤다. COD 8층 통유리 방에서 맥스 800을 외치던 얼굴. 솔레어 2층에서 열 판을 연속으로 맞히던 얼굴. 공항에서 “너 써라” 하며 웃던 얼굴.
눈물이 쏟아졌다. 참으려고 했는데 안 됐다.
창수: “형님, 도대체 왜…”
회장님: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걸은 거야. 형 괜찮아. 어른이니까.”
창수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창수: “식사는 하셨어요?”
회장님: “라면이나 하나 끓여 줘라.”
석 달째, 저녁
그렇게 석 달이 지났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담배를 피웠다.
어느 저녁, 회장님이 말했다.
회장님: “창수야. 내일 돈 좀 들어올 거다. 그거 들어오면 형 나가야겠다.”
창수: “형님, 그냥 여기 계시죠.”
회장님: “아니다. 제수씨 보기도 그렇고, 애도 있는데 형이 베란다에서 담배나 피우고. 내일 방 하나만 알아봐 줘라. 싼 데로.”
창수는 더 말리지 않았다.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창수: “형님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창수는 그날 밤 생각했다. 내일 들어올 돈이 얼마든, 회장님은 그걸 들고 방으로 가지 않을 거라고.
(9화에서 계속)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입니다. 등장인물 이름은 가명이며, 도박을 권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