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만 원에서 17억까지 1화 – 100만 페소
2,500만 원을 들고 마닐라에 온 부산 건설사 회장님. 시계 없는 손목, 오카다에서 반토막, 솔레어 뱅커 줄. 매주 2단계에서 꺾이던 남자의 공식이 깨진 밤.

등장인물
- 나(강도윤): 마카오 에이전트 10년 차. 후배 창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 배창수: 마닐라 캐주얼 정켓 소속 에이전트, 28세. 촉이 좋다.
- 남궁 회장: 부산 건설회사 대표, 50대 후반. 강원랜드·마카오 VIP 출신, 매주 마닐라를 찾는 큰손.
- 오 사장: 창수가 소속된 캐주얼 정켓 대표. 손님 돈 냄새를 누구보다 먼저 맡는다.
- 딜러들: 오카다와 솔레어의 테이블을 지키는 사람들.
시계 없는 손목

마카오에서 에이전트 밥을 먹은 지 십 년이 넘었다. 이 바닥에 오래 있으면 숫자에 무뎌진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마닐라에서 일하던 후배 창수가 소주 세 병째에 털어놓은 이야기다.
창수는 스물여덟에 마닐라로 넘어가 캐주얼 정켓 밑에서 일했다. 손님을 받아 카지노에 앉히고, 손님이 굴린 롤링에서 떨어지는 롤링피로 먹고사는 일이다. 손님이 크게 굴리면 창수도 먹고, 손님이 안 오면 창수도 굶는다.
그런 창수의 제일 큰 손님이 남궁 회장이었다. 부산 건설회사 대표. 매주 금요일 밤 비행기로 와서 1억에서 3억을 굴리고 일요일에 돌아갔다. 창수 한 달 수입의 절반이 이 사람한테서 나왔다.
회장님에게는 공식이 있었다.
1단계, 리조트월드 VIP에서 몸을 푼다.
2단계, 솔레어 VIP에서 판을 키운다.
3단계, 홍콩달러 게임으로 끝을 본다.
그런데 3단계까지 간 걸 창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회장님은 늘 2단계에서 꺾였다. 줄 한 번 잘못 타면 그대로 오링. 그래도 공항에서는 웃으면서 “다음 주에 보자” 하고 떠났다.
그 주 목요일 밤, 전화가 왔다.
회장님: “창수야, 이번엔 100만 페소만 준비해 놔라.”
창수: “네? 100만 페소요?”
회장님: “그래. 100만.”
100만 페소. 원화로 2,500만 원. 억 단위로 오던 사람이 2,500만 원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오 사장한테서 문자가 왔다.
오 사장: “남궁 회장 이번 주 얼마 들고 온대?”
창수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 답장했다.
창수: “100만 페소요.”
답장은 금방 왔다.
오 사장: “회사 어렵다는 말 돌던데. 외상 달라고 하면 절대 주지 마라. 너 책임이다.”
금요일 밤, 니노이 아키노 공항 도착 게이트. 회장님은 평소처럼 웃으며 걸어 나왔다. 창수 어깨를 두 번 두드리는 것도 똑같았다.
딱 하나가 달랐다. 오른쪽 손목.
회장님은 늘 금색 롤렉스 데이데이트를 찼다. 테이블에 칩을 밀 때마다 시계가 조명에 번쩍여서, 딜러들 사이에서 “골드 미스터”로 통할 정도였다. 그 시계가 없었다. 손목에 시곗줄 자국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창수는 묻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는 묻지 않는 게 예의다. 하지만 그 하얀 자국을 보는 순간 알았다. 이번 100만 페소는 그냥 100만 페소가 아니라는 걸.
오카다, 반토막

회장님: “오카다 가자. 거기 요즘 판이 좋다더라.”
오카다 마닐라는 그때 막 뜨던 곳이었다. 로비 분수 앞에 관광객이 몰려 있었고, 플로어는 아바타 게임 소리로 귀가 아팠다. 화면 속 딜러가 카드를 까면 수십 명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회장님은 처음부터 서둘렀다. 평소 같으면 열 판은 그림만 보고 들어갔을 사람이 앉자마자 5만 페소를 밀었다.
플레이어. 졌다.
회장님: “다시.”
플레이어. 또 졌다.
세 판째에 10만 페소. 뱅커가 6으로 이기는 줄 알았는데 플레이어가 세 번째 카드로 7을 만들었다. 옆 테이블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회장님 쪽 판이 아니었다. 아바타 게임의 다른 판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꼭 회장님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고 창수는 말했다.
한 시간 만에 100만 페소가 52만 페소가 됐다.
창수는 그때부터 회장님 옆얼굴만 봤다.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회장님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강원랜드 시절부터 크게 지르기 직전에 나오는 버릇이었다.
남은 52만 페소 중 40만 페소를 집어 드는 손이 보였다.
창수: “회장님.”
회장님 손이 멈췄다.
창수: “여기 너무 시끄럽습니다. 솔레어 가시죠. 거기 조용한 테이블 하나 비워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이건 거짓말이었다. 솔레어에 전화한 적도 없었다. 그냥 저 40만 페소가 이 시장통 같은 테이블에 올라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회장님은 칩을 쥔 채 한참 창수를 봤다. 그러다 칩을 주머니에 넣었다.
회장님: “그래. 여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차 안에서 회장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마닐라 베이 쪽 불빛이 지나갔다. 창수는 운전석 뒤에서 핸드폰을 꺼내 솔레어 VIP 매니저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가니까 조용한 테이블 하나만 잡아 달라고. 답장이 오기까지 2분이 20분 같았다.
솔레어, 52만 페소

솔레어 하이리밋 구역은 공기부터 달랐다. 카펫이 소리를 먹었다. 테이블마다 손님은 서넛, 딜러는 말이 없었다. 칩 부딪히는 소리, 카드가 펠트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만 났다.
회장님은 앉았다. 그리고 이번엔 들어가지 않았다.
한 판. 두 판. 다섯 판. 열 판.
회장님은 그림만 봤다. 딜러가 카드를 돌리고, 다른 손님들이 칩을 따고 잃는 동안 회장님 손은 테이블 아래에 있었다. 창수는 그게 더 무서웠다고 했다. 오카다에서 서두르던 사람이 갑자기 너무 조용해졌으니까.
열한 번째 판. 뱅커. 열두 번째 판. 뱅커. 열세 번째. 뱅커.
회장님이 10만 페소를 밀었다. 뱅커.
딜러가 플레이어 쪽을 먼저 깠다. 5와 2, 7. 강했다. 뱅커 쪽 카드 두 장이 회장님 앞으로 밀려왔다. 쪼는 건 가장 크게 건 손님 몫이다.
회장님은 첫 장을 세로로 천천히 밀어 올렸다. 모서리에 점 하나가 보였다. 다시 조금 더. 점이 둘, 셋. 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6이었다.
두 번째 장. 회장님이 이번엔 가로로 쪼았다. 손끝이 떨리는 게 창수 눈에도 보였다. 카드 옆면에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림이거나 10이었다. 0점. 합이 6.
6 대 7. 졌다.
회장님이 졌다. 42만 페소 남았다.
회장님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다음 판에 다시 10만 페소를 뱅커에 밀었다. 이번엔 뱅커 내추럴 9. 쪼지도 않았다. 딜러가 까자마자 끝났다.
다시 52만 페소.
그다음 판, 20만 페소. 뱅커 8 대 플레이어 3. 72만 페소.
그다음 판, 30만 페소. 뱅커. 102만 페소. 본전.
그다음 판, 회장님이 50만 페소를 들었다.
창수: “회장님, 본전 오셨습니다. 한 번 쉬시고…”
회장님은 대답 대신 50만 페소를 뱅커에 밀었다.
뱅커 쪽 카드가 다시 회장님 앞으로 왔다. 첫 장은 4. 두 번째 장. 회장님이 엄지로 모서리를 들어 올렸다. 점 하나. 두 개. 회장님이 그대로 멈췄다. 손가락만 카드 위에 얹은 채 3초, 5초.
옆 테이블 손님까지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이 카드를 확 뒤집었다. 5. 합이 9.
플레이어 쪽은 볼 것도 없었다.
152만 페소.
줄을 끝까지 탄 남자

그날 뱅커는 미친 듯이 이어졌다. 회장님은 줄을 붙였다. 꺾일 때까지 따라가는 거다. 여섯 번, 일곱 번. 판이 넘어갈 때마다 칩이 쌓였다.
200만 페소. 280만. 350만.
창수는 머릿속으로 롤링피를 계산하고 있었다. 이렇게만 굴리면 이번 주 창수 몫만 수백만 원이었다. 오 사장이 웃을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다 계산을 멈췄다. 회장님 손목의 하얀 자국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여덟 번째 뱅커가 나온 판. 회장님 앞에는 400만 페소가 넘게 쌓여 있었다. 이제 아홉 번째 판이었다. 줄을 붙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뱅커다. 회장님은 평소에 이런 판에서 맥스를 질렀다. 그리고 거의 매번 여기서 꺾였다. 2단계에서 꺾이는 회장님의 공식이 바로 이 판이었다.
회장님이 칩을 집었다. 100만 페소.
창수는 이번엔 말리지 않았다. 말려도 안 들을 걸 알았다. 그냥 눈을 감았다.
칩이 펠트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소리가 이상하게 짧았다. 창수가 눈을 떴다.
회장님은 그 100만 페소를 자기 쪽으로 다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딜러가 카드를 깠다. 플레이어 8. 뱅커 2.
줄이 꺾였다.
테이블에 있던 다른 손님 둘이 동시에 욕을 뱉었다. 둘 다 뱅커에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회장님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고, 다음 판에 다시 들어갔다.
창수는 그때 처음으로 회장님이 무섭다고 느꼈다고 했다. 이기는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꺾이기 직전에 손을 빼는 사람, 지금까지의 공식을 깨는 사람이 무서웠다.
세 시간 뒤, 회장님 앞에는 520만 페소가 있었다.
조용한 방

새벽 한 시. 회장님이 칩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회장님: “창수야. 여기도 시끄럽다.”
창수는 주위를 둘러봤다. 하이리밋 구역은 여전히 조용했다. 시끄러운 건 테이블이 아니었다. 회장님 머릿속이었다.
회장님: “더 조용한 방 없냐. 한 판에 크게 갈 수 있는 데로.”
창수는 알았다. 지금 회장님은 520만 페소를 들고 일어설 생각이 없다. 더 큰 판을 원한다.
머릿속에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하나는 오 사장 목소리였다. 손님이 크게 굴리면 너도 크게 먹는다. 지금이 회장님 인생에 한 번 오는 날이다.
다른 하나는 공항에서 본 하얀 시곗줄 자국이었다.
창수는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내렸다. 시티 오브 드림스, 8층 정켓 룸. 회장님을 두 번 모셔 본 곳. 한쪽 벽이 통유리로 된 방. 맥스를 협상할 수 있는 방.
통화 버튼 위에서 창수 엄지가 멈췄다.
회장님: “왜, 없냐?”
창수: “…있습니다.”
창수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세 번 갔다. 네 번째에 매니저가 받았다.
창수: “8층 방 지금 비어 있어요? 남궁 회장님 모시고 갑니다. 그리고…”
창수는 회장님을 한 번 쳐다봤다. 회장님은 520만 페소를 칩 랙에 한 줄씩 세워 담고 있었다.
창수: “맥스 협상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화에서 계속)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입니다. 등장인물 이름은 가명이며, 도박을 권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