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만 원에서 17억까지 10화 – 국밥값
샹그릴라의 마지막 저녁, "비행기 표 좀 알아봐 줘라", 그리고 공항에서 건넨 꼬깃꼬깃한 국밥값 50만 원. 시리즈 마지막 화.

등장인물
- 나(강도윤): 마카오 에이전트 10년 차. 창수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
- 배창수: 세부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전 정켓 에이전트. 회장님을 배웅한다.
- 남궁 회장: 부산 건설회사 대표. 400만 페소를 들고 마지막 저녁을 산다.
샹그릴라
막탄 샹그릴라 리조트 일식당. 세부에서 제일 비싼 일식집이었다.
회장님이 코스를 시켰다. 1인분 8,800페소. 필리핀 직장인 한 달 월급이 8천에서 1만 2천 페소다. 한 사람 저녁값이 한 달 월급이었다.
그저께까지 택시비가 없어서 막탄에서 라푸라푸까지 걸어오던 사람이었다.
창수의 아내와 아들도 함께였다. 아이는 회장님 옆에 앉아 연어 초밥을 집어 먹었다. 회장님은 아이 접시에 계속 음식을 덜어 줬다.
석 달 만에 처음으로 회장님이 크게 웃었다.
300만 원과 20개

식사가 끝나 갈 무렵, 회장님이 말했다.
회장님: “창수야. 집에 쌀 떨어졌다더라. 형수한테 300만 원만 보내 줘라. 남은 페소에서.”
창수: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정리해 온 거 있지. 20개만 줘 봐라.”
창수가 20만 페소를 꺼냈다. 원화로 500만 원.
회장님은 그걸 창수 아내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제수씨, 석 달 동안 정말 미안했습니다. 내가 남의 집에서 못 할 짓을 했어요.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생활비에 보태 쓰세요.”
자기 집에는 300만 원. 창수 집에는 500만 원.
창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이게 회장님이구나. 돈은 없어도 가오는 있는 사람. 도박꾼에게도 의리가 있다면, 이런 거구나.
두 시간

식당을 나오며 회장님은 프런트에서 3일짜리 스위트룸을 무료로 받았다. 마바리장에서 굴린 롤링 덕분이었다.
회장님: “창수야, 제수씨랑 애기 데리고 들어가라. 형은 이제 생바할 거니까, 차분하게 할 거다.”
창수는 회장님을 호텔에 내려 주고 집으로 갔다.
두 시간 뒤, 전화가 왔다.
회장님: “창수야. 비행기 표 좀 알아봐 줘라. 형 내일 가야겠다.”
창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숙면

이 바닥에 오래 있으면 알게 되는 게 있다.
돈을 따면 잠이 안 온다. 머릿속에서 칩이 계속 굴러간다. 더 딸 수 있을 것 같고, 내일 또 앉고 싶다.
그런데 가진 걸 전부 쏟아붓고, 더 나올 데도 없고, 빌릴 데도 없을 때. 이제 진짜 끝이라는 걸 알게 될 때. 그때 사람은 숙면을 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나도 마카오에서 십 년 가까이 일하며 단 하루도 편하게 자 본 적이 없다. 새벽 두 시에 전화가 오면 열에 아홉은 돈 빌려 달라는 전화였다. 그래서 안다. 이제 그만 가겠다는 말이 어떤 무게인지. 그리고 그런 밤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창수도 알았다.
창수는 아내에게 먼저 자라고 하고 다시 호텔로 갔다. 그리고 회장님 옆에 앉았다. 둘은 밤새 담배를 피웠다. 한국 가서 뭘 할지, 회사는 어떻게 정리할지, 사모님한테는 뭐라고 할지. 회장님 인생 설계를 새벽까지 같이 했다.
창수는 그날 밤 한숨도 안 잤다. 회장님은 새벽에 잠깐 잠들었다. 아주 깊게.
국밥값

필리핀은 체류 기간이 넘으면 비자 연장을 해야 출국할 수 있다. 여행사에 4천 페소를 주면 급행으로 처리해 준다. 창수는 아침 일찍 여행사에 들러 비자를 받고, 정오가 조금 넘은 비행기 표를 끊었다.
막탄 공항 출국장 앞.
창수가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가이드 일로 모아 둔 쌈짓돈이었다. 꼬깃꼬깃한 50만 원.
창수: “형님, 한국 가시면 국밥이라도 한 그릇 드세요.”
회장님은 봉투를 한참 내려다봤다.
3년 전, 이 사람은 창수에게 1억 300만 원을 “너 써라” 하며 던져 줬다. 오늘은 창수가 50만 원을 국밥값이라며 내밀었다.
회장님이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창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처음 마닐라 공항에서 만났을 때처럼.
출국장 안으로 걸어가는 회장님 뒷모습이 3년 전보다 한참 작았다.
마지막 전화
그날 밤, 창수는 잠을 못 잤다. 한국에 도착해서 집으로 안 가고 다른 데로 가실까 봐.
밤 열한 시, 전화가 왔다.
회장님: “창수야, 형 잘 도착했다. 걱정하지 마라.”
창수: “형님…”
회장님: “형 이대로 안 죽는다. 큰돈 들어오면, 다른 데 안 가고 너한테 갈게. 네가 형한테 해 준 거, 형 가슴에 다 묻어 두고 있다. 곧 보자.”
그 “곧 보자”가 몇 년째다.
창수는 아직 회장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큰돈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소주 세 병

여기까지가 그날 밤 창수가 나한테 해 준 이야기다.
이야기를 마친 창수는 남은 소주를 내 잔에 따라 줬다.
창수: “형, 사람들이 이런 얘기 들으면 17억 딴 것만 기억하더라고요. 2,500만 원으로 17억. 그것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십 년을 일하며 내가 본 것은 이거다. 크게 따 본 사람은 크게 잃는다. 한 판에 2억을 걸던 사람도 결국 택시비가 없어서 밤길을 두 시간 반 동안 걷는다. 1미터 높이에서는 뛰어내려도 괜찮다. 하지만 20층에서 떨어지면 끝이다.
카지노에 가더라도, 게임을 하더라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그 높이를 넘지 않는 사람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남궁 회장은 아직 돌아오는 중이다.
(끝)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입니다. 등장인물 이름은 가명이며, 도박을 권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