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만 원에서 17억까지 2화 – 8층 통유리 방
COD 8층 통유리 VIP룸, 맥스 800만 페소. 그림은 나쁜데 가는 족족 맞히는 회장님, 그리고 두 번이나 동나 버린 롤링칩.

등장인물
- 배창수: 마닐라 캐주얼 정켓 소속 에이전트, 28세. COD 8층은 처음이다.
- 남궁 회장: 부산 건설회사 대표, 50대 후반. 솔레어에서 520만 페소를 만들었다.
- 핏보스 리: COD 8층 VIP룸 책임자. 맥스를 올려 줄 권한이 있다.
- 딜러 레이: 8층 VIP룸 딜러. 필리핀 남자 딜러. 손이 빠르고 표정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창수는 걸음을 멈췄다.
벽이 없었다. 정확히는 벽이 전부 유리였다. 사방이 통유리라 방 전체가 마닐라 밤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발아래로 솔레어 쪽 불빛이 보였고, 그 너머로 마닐라 베이의 검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면 저 아래 도로까지 내려다보였다.
시계도 없었다. 카지노에 시계가 없는 건 당연했지만, 이 방은 창밖까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창수: “회장님, 저 여기 처음입니다.”
회장님: “알아. 옆에만 있어. 내가 해 봤으니까.”
회장님은 이 방이 익숙했다. 강원랜드 VIP와 마카오를 십 년 넘게 다닌 사람이다. 창수가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는 사이, 회장님은 벌써 테이블 하나를 골라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 리밋 표시판이 보였다. 미니멈 2만, 맥스 400만 페소.
회장님이 표시판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회장님: “아까 오카다에서 맥스만 높았으면 거기 오늘 문 닫았어.”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심이었다. 창수는 웃지 못했다. 400만도 1억 원이다. 그런데 회장님 눈은 표시판의 400이라는 숫자에 머물러 있었다. 모자라다는 눈이었다.
회장님: “창수야. 핏보스 불러라.”
맥스 협상

핏보스 리가 왔다. 마흔 중반의 중국계 필리핀인. 회장님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맥스 올립시다.”
리: “얼마나 원하십니까?”
회장님: “800.”
리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 800만 페소. 한 판에 2억 원이다. 이 방 하나가 그 배팅을 받아 낼 수 있는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는 방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한 통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통, 세 통. 통화가 길어질수록 회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칩을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창수는 그 칩 소리가 시계 초침 소리처럼 들렸다고 했다.
5분 뒤 리가 돌아왔다.
리: “800, 승인됐습니다.”
회장님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520만 페소를 테이블에 올렸다.
첫 번째 슈

딜러 레이가 새 카드를 섞었다. 여덟 덱. 플라스틱 커트 카드를 회장님에게 내밀었다. 회장님이 슈 중간쯤에 커트 카드를 꽂았다.
첫 판. 회장님은 20만을 플레이어에 놓았다. 졌다.
두 번째 판. 20만, 뱅커. 이겼다.
세 번째 판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됐다.
그림은 좋지 않았다. 줄이 길게 붙지도 않았고, 깔끔한 핑퐁도 아니었다. 뱅커 둘, 플레이어 하나, 뱅커 하나, 플레이어 셋. 창수가 보기엔 어디에 걸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래서 어디에 걸어도 틀릴 것 같은 그림이었다.
그런데 회장님은 맞혔다.
플레이어에 100만. 맞았다. 뱅커에 200만. 맞았다. 다시 플레이어에 300만. 쪼지도 않았다. 레이가 까자마자 플레이어 8이었다.
창수는 회장님 옆얼굴을 봤다. 웃고 있지 않았다. 계산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다음 칩을 집는 얼굴이었다.
400만. 뱅커. 맞았다.
레이가 이긴 칩을 밀어 줄 때마다 회장님 앞 칩 더미가 높아졌다. 100만 페소짜리 칩을 열 개씩 쌓은 기둥. 이 바닥에서는 그걸 떡집이라고 부른다. 떡집이 하나, 둘, 셋.
첫 슈가 끝났을 때 창수가 칩을 셌다.
2,000만 페소.
5억 원이었다. 한 시간 반 만에.
400개, 500개

창수: “회장님, 쉬었다 하시죠. 물이라도…”
회장님: “슈 바꿀 때 마시면 돼.”
두 번째 슈부터 회장님 배팅이 달라졌다.
판마다 400만, 500만. 원화로 1억, 1억 2,500만 원이 한 판에 나갔다. 창수는 그 돈이 다발로 테이블에 올라간다고 상상해 봤다고 했다. 사과 상자 하나가 판마다 오가는 거다. 다발로 하라면 아무도 못 한다. 칩이니까 할 수 있는 거다. 손가락 두 개로 떡집 반을 밀면 끝이다.
회장님은 그림이 좋아 보이면 500을 밀었다. 조금 애매하면 100, 200으로 줄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큰 판은 먹고 작은 판은 죽었다.
500 먹고, 100 죽고. 400 먹고, 200 죽고. 500 먹고, 500 먹고.
먹죽, 먹죽. 그런데 먹을 때는 크고 죽을 때는 작으니 칩은 계단처럼 올라만 갔다.
3,000만. 4,000만.
방 안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동난 롤링칩

처음엔 레이의 손이었다. 카드를 빼는 속도가 반 박자 느려졌다. 다음은 리였다. 테이블 뒤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무전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그리고 롤링을 체크하던 직원이 리에게 다가가 뭔가 속삭였다.
리가 회장님에게 왔다.
리: “회장님,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롤링칩이 부족합니다.”
창수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이 방에서는 손님이 이기면 롤링칩으로 돈을 준다. 손님이 지면 그 칩이 다시 방으로 돌아오고, 다른 손님에게 나간다. 칩은 원래 돌고 도는 거다.
그런데 회장님은 지지 않았다. 이긴 칩은 회장님 앞에 쌓이기만 했고, 방으로 돌아오는 칩이 없었다. 8층 VIP룸에 있던 100만 페소짜리 롤링칩이 전부 회장님 앞으로 와 버린 것이다.
직원이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동안 리는 회장님 옆 칩을 캐시칩으로 바꿔 옆에 따로 쌓아 두었다. 테이블 옆에 칩 기둥이 하나 더 생겼다.
회장님은 그 틈에 담배를 꺼냈다.
회장님: “창수야.”
창수: “네.”
회장님: “이게 내 2단계다.”
창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매주 꺾이던 그 자리. 회장님은 지금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세 번째 슈
칩이 다시 올라왔다. 세 번째 슈.
이번엔 그림이 더 나빴다. 줄이 붙을 만하면 꺾이고, 꺾을 만하면 붙었다. 창수가 보기엔 들어갈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회장님은 여전히 들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맞혔다.
레이가 플레이어 쪽 카드를 까서 회장님 앞으로 밀었다. 회장님이 첫 장을 엄지로 들어 올렸다. 3. 두 번째 장. 회장님은 이번엔 쪼지 않고 그냥 뒤집었다. 6. 합이 9.
리가 들고 있던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그다음 판, 500. 뱅커 7 대 플레이어 5.
그다음 판, 500. 플레이어 8 대 뱅커 6.
딜러가 바뀌었다. 레이가 일어나고 다른 딜러가 앉았다. 흔한 일이었다. 운을 끊으려고 딜러를 바꾸는 건. 새 딜러 얼굴에도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는 게 아니라 굳어 있었다.
창수는 그때부터 회장님을 보지 않고 방 안 사람들 얼굴을 봤다고 했다. 핏보스, 딜러, 롤링 직원, 문 앞 경호원. 다들 같은 얼굴이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얼굴.
세 번째 슈가 반쯤 지났을 때, 롤링칩이 또 동났다.
다시 게임이 멈췄다. 직원이 또 아래층으로 뛰었다.
65개

정적 속에서 창수가 칩을 셌다. 회장님 앞 떡집, 옆에 쌓아 둔 캐시칩, 잔돈 칩까지.
100만 페소짜리가 65개. 자투리가 조금.
6,500만 페소.
창수는 머릿속으로 25를 곱했다. 16억 2,500만 원. 자투리까지 하면 17억 가까이.
2,500만 원을 들고 온 사람이었다. 공항에서 시곗줄 자국을 본 게 불과 하루 전이었다.
창수 손이 떨렸다. 기뻐서가 아니었다. 무서워서였다.
이 방은 카지노가 아니다. 카지노 안에 세 들어 장사하는 정켓의 방이다. 손님이 이기면 그 돈은 카지노 금고가 아니라 이 방 사장 주머니에서 나간다. 그 사장이 16억을 갖고 있을까. 갖고 있다고 해도, 순순히 내줄까.
창수는 핏보스 리를 봤다. 리는 또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번엔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중국어였다. 창수가 알아들은 단어는 딱 하나였다.
“사장.”
(3화에서 계속)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입니다. 등장인물 이름은 가명이며, 도박을 권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