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만 원에서 17억까지 3화 – 쇼핑백
6,500만 페소 앞에서 일어나야 하는 남자. 캐셔 여덟 명, 똥 씹은 딜러들의 얼굴, 그리고 1억짜리 벽돌로 터질 듯한 COD 쇼핑백.

등장인물
- 배창수: 마닐라 캐주얼 정켓 소속 에이전트, 28세. 회장님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 남궁 회장: 부산 건설회사 대표, 50대 후반. 6,500만 페소 앞에 앉아 있다.
- 핏보스 리: COD 8층 VIP룸 책임자. 계속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 정켓 사장: 8층 VIP룸 주인. 끝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칩을 기다리는 10분

롤링칩을 가지러 간 직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다.
회장님은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마닐라 베이 위로 배 한 척이 천천히 지나갔다. 회장님 앞에는 떡집이 일곱 기둥, 옆에는 캐시칩 기둥이 따로 서 있었다. 6,500만 페소.
창수는 그 10분 동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고 했다.
첫째, 이 방 사장이 16억을 줄 수 있느냐.
둘째, 줄 수 있다고 해도 오늘 주느냐.
셋째, 회장님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느냐.
셋 중에 제일 어려운 게 세 번째였다.
한 달 반
창수는 예전에 오 사장한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몇 년 전, 남궁 회장이 동남아 어느 변두리 카지노 VIP룸에서 20억을 딴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방이 돈을 못 줬다. 정켓 사장은 “다음 주에 정리해 드리겠습니다”를 여섯 번 반복했다. 회장님은 그 돈을 한 달 반에 걸쳐 쪼개서 받았다. 그것도 다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바닥에서 VIP룸은 가게 안의 가게다. 메인 정켓은 카지노에 수십억, 많게는 백억 단위의 보증금을 걸고 들어간다. 그 밑에 서브 정켓이 있고, 그 밑에 창수가 소속된 것 같은 캐주얼 정켓이 있다. 캐주얼 정켓은 보증금도 거의 없다. 롤링만 많이 돌려 주면 끝이다.
문제는 어느 방이든 금고에 있는 현금보다 손님이 더 많이 따 버리면 끝이라는 거다. 동남아 작은 방들은 손님이 오면 무조건 받는다. 어차피 손님은 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다 게임 잘하는 손님 하나가 10억, 20억을 때려 버리면 그 방은 그대로 문을 닫는다. 카지노는 그대로 영업하는데, 그 안의 방 하나만 조용히 불이 꺼진다. 손님은 딴 돈을 들고 하소연할 데도 없다.
창수는 리의 통화 소리를 들었다. 중국어 사이사이에 “사장”이라는 단어가 몇 번 섞였다.
"지금 이 그림에서?"

창수는 회장님 쪽으로 몸을 숙였다.
창수: “회장님.”
회장님: “왜.”
창수: “오늘 여기까지 하시죠.”
회장님이 창수를 봤다. 창수가 처음 보는 눈이었다. 화난 눈도 아니고 기쁜 눈도 아니었다. 아직 판 안에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회장님: “지금 이 그림에서 일어나라고?”
창수: “그림이 아니라 방을 보셔야 합니다.”
회장님: “방?”
창수: “롤링칩이 두 번 동났습니다. 핏보스가 사장이랑 통화만 20분째입니다. 딜러 얼굴 보세요.”
회장님이 고개를 돌렸다. 새로 앉은 딜러는 카드 슈에 손을 얹은 채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는 등을 돌리고 통화 중이었다. 문 앞 경호원은 아까보다 한 명이 늘어 있었다.
창수: “회장님, 변두리 그 방 기억나시죠. 한 달 반.”
회장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창수는 말해 놓고 후회했다. 손님 아픈 데를 건드린 거다. 이 바닥에서 에이전트가 손님한테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회장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그리고 다 피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수는 그 담배 한 대가 타 들어가는 시간이 인생에서 제일 길었다고 했다.
마지막 연기를 내뱉고 회장님이 말했다.
회장님: “캐시아웃 해라.”
여덟 명

창수가 리에게 캐시아웃을 요청하자, 리는 통화를 끊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1분도 안 돼 사람들이 몰려왔다.
위층에서 내려오고, 아래층에서 올라오고, 옆방에서 건너왔다. 핏보스와 캐셔가 모두 여덟 명. 딜러들은 테이블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창수는 그 딜러들 얼굴을 평생 못 잊는다고 했다. 다들 똥 씹은 얼굴이었다.
나중에 창수는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그 얼굴들 보는데 속이 시원했다고.
칩 세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캐셔 둘이 떡집을 하나씩 허물며 셌고, 다른 둘이 그걸 다시 셌다. 리가 숫자를 받아 적고, 누군가에게 또 전화를 했다.
창수는 그 전화가 제일 무서웠다. “오늘은 현금이 부족하니 내일 정산하겠습니다.” 그 한마디가 나오면 끝이었다.
리가 전화를 끊고 회장님에게 왔다.
리: “회장님, 현금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창수는 그제야 숨을 쉬었다고 했다.
벽돌

돈은 벽돌처럼 나왔다.
1,000페소짜리 지폐 다발을 묶고, 그걸 다시 묶었다. 100만 페소가 벽돌 한 장만 했다. 그런 벽돌 열 장이 한 묶음, 1,000만 페소. 원화로 2억 5천.
그 묶음을 담을 데가 없었다. 직원 하나가 1층 매장에서 종이 쇼핑백을 들고 올라왔다. COD 로고가 찍힌 흰 쇼핑백.
캐셔가 쇼핑백에 묶음을 넣었다. 벽돌 여덟 장이 들어가자 쇼핑백 옆구리가 팽팽해졌다. 거기에 다발을 하나 더 쑤셔 넣었다. 손잡이 실밥이 늘어나는 게 보였다.
한 묶음, 2억 5천. 두 묶음, 5억. 세 묶음, 7억 5천. 네 묶음, 10억.
다섯, 여섯, 그리고 자투리까지 일곱.
창수는 쇼핑백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바닥을 두 팔로 받쳐 안았다. 손잡이가 끊어지면 1억 원짜리 벽돌들이 8층 카펫 위에 쏟아질 테니까.
엘리베이터 거울에 두 사람이 비쳤다. 반백의 회장님, 그 옆에 쇼핑백을 끌어안은 스물여덟 살짜리. 명품관에서 쇼핑하고 나온 부자 아버지와 짐 드는 아들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회장님이 거울 속 창수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 “창수야.”
창수: “네.”
회장님: “너 아니었으면 나 저 방에서 내일 또 앉았다.”
창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쇼핑백이 너무 무거웠다.
태양성

새벽 네 시. 그 돈을 호텔 방에 둘 수는 없었다.
회장님: “태양성 내려가자. 디파짓 해.”
솔레어 안 태양성(선시티) 룸. 한국 손님들 사이에서 자금력이 확실하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창수는 쇼핑백을 내려놓고 직원이 돈을 세는 걸 지켜봤다. 다시 30분.
디파짓 6,600만 페소. 남은 칩을 정리하면서 100만이 더 붙었다. 직원이 영수증을 써 주고 회장님 이름 옆에 숫자를 적었다. 창수는 그 영수증을 지갑 안쪽에 접어 넣고 몇 번이나 손으로 확인했다.
회장님: “창수야, 방 바꿔라. 지금 방은 좁다.”
1박 10만 페소짜리 방도 있었다. 창수는 차마 그건 못 잡았다. 하룻밤에 250만 원이다. 대신 5만 2천 페소짜리 스위트룸을 사흘 잡았다. 한국 아파트로 치면 50평은 되는 방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회장님은 재킷을 소파에 던지고 룸서비스를 시켰다. 스테이크 두 개와 맥주 여섯 병.
창수는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직 손이 떨렸다.
동이 트고 있었다. 마닐라 베이 위로 하늘이 회색에서 분홍으로 바뀌었다. 회장님은 맥주를 반쯤 마시고 창밖을 봤다.
회장님: “창수야. 이번 주는 3단계까지 간 거냐?”
창수: “아닙니다, 회장님. 이번 주는 그냥 끝판입니다.”
회장님이 웃었다. 공항에서 만난 뒤로 처음 보는 진짜 웃음이었다.
회장님: “들어가 자라. 수고했다.”
창수는 새벽 여섯 시에 집에 들어갔다. 샤워도 못 하고 침대에 쓰러졌다. 지갑 속 영수증을 한 번 더 만져 보고 눈을 감았다.
오전 아홉 시
휴대폰이 울렸다.
회장님: “창수야, 어디냐.”
창수: “집입니다.”
회장님: “빨리 와라. 그리고 태양성에 전화해서 60개만 빼라고 해.”
60개. 6,000만 페소. 디파짓의 거의 전부였다.
창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세 시간밖에 못 잤는데 잠이 확 달아났다.
이 바닥에서 몇 년 일하며 생긴 촉이 하나 있었다. 회장님이 먼저 자기를 찾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칩이 없거나, 돈이 없거나.
지금은 둘 다 아니었다. 돈은 6,600만 페소나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4화에서 계속)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입니다. 등장인물 이름은 가명이며, 도박을 권하지 않습니다.